2010년이 저물어 가던 12월 20일 밤, 마지막임을 아는 듯 짙은 안개가 남춘천역을 휘감았다. 젊은 날 녹내 나는 춘천행 기차에 올라 보지 않은 청춘도 드물 것이다. 복선으로 교행하며 앞만 보고 달릴 새 전철의 완공으로 낡은 경춘선은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세상 일에 덮여 있던 오래된 기억들이 잡힐 듯 펼쳐졌다.
상하행을 예매했으나 돌아오는 기차를 놓쳐 다시 표를 끊었던 그날,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참 많았던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필자는 무엇을 주고 있고, 줄 수 있을까 자문해보았다.
2010년 12월 20일, 남춘천역, 5D Mark Ⅱ, EF 24mm f1.4L Ⅱ USM
주광색 형광등의 사무적인 불빛 속을 걷는 탑승객들
2010년 12월 20일, 남춘천역, 5D Mark Ⅱ, EF 24mm f1.4L Ⅱ USM
경춘선은 이제 없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그날의 플랫폼처럼,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기적을 울릴
것이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추억을 박제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밤이다.
2011년 7월 30일, 경강역, 5D Mark Ⅱ, EF 24mm f1.4L Ⅱ USM
경강역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경기도의 끝, 강원도의 시작으로서 가평에서 북한강 건너 첫 번째 역인 이 곳을 경춘선이 멈추고 일곱 달이 지난 2011년 7월 30일에 찾아보았다.
모든 역에 정차하는 비둘기호가 운행되던 90년 초, 필자가 탄 비둘기호 상행 열차가 백양리역에 서지 않고 경강역까지 와버린 일이 있었다. 후진하여 백양리로 돌아가 승객을 탑승시켰는데, 복선이 아니며, switchback도 아닌 선로에서 일어났던 그 날의 작은 사건이 기억에 선하다.
어느새 선로들이 뜯겨 나가고, 플랫폼과 역사들도 허물려 주차장으로 변해 가는 경춘선에서 옛 모습 아직 잃지 않은 백양리역, 이 곳에 내리는 별빛이 담고 싶어 먼 길 마다하지 않았으나 하늘은 밤이 되도록 흐리고야 말아 삼각대는 펼치지 못하였다.
영화 '편지'에서의 아담한 모습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지금도 회자되는 아름다운 대사들을 간직한 작은 역사는 다시 열릴 일 없음을 안내하듯 굵은 못질이 된 채 닫혀 있었다. 출입문을 가로지른 우악스런 빗장을 보노라니 지난 날 환유의 소망이 오늘의 경강역을 위한 위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네가 걸을 때, 난 너의 발을 부드럽게 받쳐 주는 흙이 될 거야.
네가 앉을 때, 난 너의 무릎 밑에 엎드린 넓고 편평한 그루터기가 될 거야.
네가 슬플 때, 난 너의 작은 어깨가 기댈 고목나무가 될 거야.
네가 힘들 때, 난 두 팔 벌려 하늘을 떠받친 숲이 될 거야.
네가 울 때, 난 별을 줍듯 너의 눈물을 담아 기쁨의 생수를 만들 거야.
마을 주차장이 된 경강역, 2011년 7월 30일.
사람 떠난 이 곳에도 새 주소가 붙었다. 2011년 7월 30일.
- 박신양 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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